<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1599년 6월 6일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포르투갈계 유태인 출신의 변호사였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비아와 스페인의 하급귀족 출신인 헤로니마 벨라스케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이탈리아의 화풍을 거부했던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아래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12살이 되던 해 첫 스승을 떠나면서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예술가이자 교사였던 프란시스코 파체코 아래서 견습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파체코의 교실에 5년 동안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세비야의 화풍과 비례와 원근법 등에 대해 배웠다. 1620년대 초 세비야에서 그는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618년 그는 스승이었던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 파체코와 결혼하였다. 막내였던 이그나시아 데 실비아 벨라스케스 이 파체코 어려서 죽고 말았고 맏딸이었던 프랑시스카 데 실비아 발레스케스 이 파체코는 1633년 8월 21일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교회의 화가였던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와 결혼하였다. 딸이 결혼하던 즈음에 벨라스케스는 그의 걸작들을 그렸다. 벨라스케스는 1622년 4월 초에 왕의 사제였던 후안 데 폰세카의 추천서를 받고 마드리드로 향한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가 시인 공고라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는 월계수 왕관을 쓴 공고라를 그렸는데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이후에 그의 그림이 다시 칠해졌다.
1622년 12월 왕이 가장 좋아하던 궁정 화가인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가 죽게 된다. 이에 돈 후안 데 폰세카가 벨라스케스를 궁정으로 오도록 명령하였다. 폰세카는 벨라스케스에게 50더컷를 주었고 젊은 화가가 그의 집에 함께 머물도록 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폰세카의 초상화는 왕궁에 걸리게 된다. 이후 왕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말을 탄 왕의 모습이 1623년 그려졌다. 당시 벨라스케스는 매달 20더컷의 월급을 받았으며 의료비, 집세와 다른 기타 그림에 대한 수입을 보장받았다. 이 그림은 펠리페 4세가 산책하던 곳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프라도 박물관에 1670년, 1671년 그려진 벨라스케스의 왕을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의 그림은 스페인의 화풍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펠리페 2세를 그린 네덜란드 출신 화가 안토니오 모르를 상시시킨다. 체감이 아주 잘 드러나게 묘사되었다. 같은 해 훗날 찰스 1세가 된 웨일스 공이 스페인 궁정을 방문하였고 벨라스케스가 왕자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지만 이 그림 또한 사라졌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렘브란트의 동시대의 초상화, 자화상, 성경 장면의 삽화는 그의 가장 위대한 창조적 업적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에서 그는 고전적 도상학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그가 자신의 경험의 필요조건에 맞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성경 장면의 묘사는 렘브란트의 특정 텍스트에 대한 지식, 고전적 구성의 동화,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그의 관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해외에 나간 적이 없지만, 이탈리아 거장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초상화 화가로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둔 후, 렘브란트의 말년은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의 일생 동안 인기가 있었고, 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20년 동안 그는 많은 중요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가르쳤다.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 서쪽 레이던에서 방아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이고 렘브란트는 개신교 신자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코프 판 스바넨뷔르흐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하였다. 1642년 '야경'을 제작하였으나 당시에는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마저 사망하자,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작품에 온 힘을 쏟았다. 1656년 파산 선고로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로 그의 굳은 신념은 두터운 신앙심에서 우러나왔기에 특히 종교화에 많은 걸작을 남겼다. 남긴 작품 수는 유화·수채화·동판화·데생 등을 포함하여 2천여 점이나 된다.
그의 작품 속 대상에 대해 사실적 수법을 쓴 다른 네덜란드 파의 화가와 다름이 없으나, 빛의 효과에 있어서는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또 그는 북부 유럽 동판화의 대가로서 약 300점의 걸작을 남겼으며, 이 동판화만으로도 그는 세계 미술 사상 최대의 화가로 인정된다.
렘브란트의 그림의 특징은 시대의 관행을 뛰어넘어 개성을 발휘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야경의 경우 얼굴이 모두 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는데, 이는 모두 얼굴이 나오게 하는 단체 인물화가들의 관행을 뛰어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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